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 결론부터 말하자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시 되찾은 것은 아나톨리아 서부에 자리잡은 [[니케아 제국]]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앙정부가 와해되어버린 이후, 귀족들은 옛날처럼 내전을 벌이지 않았으며, 세력이 상당히 있으면서도 전 황실이었던 콤네노스 및 앙겔로스 가문과 친인척으로 이어져 정통성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 및 가문을 중심으로 해서 각 근거지마다 새로운 나라들이 세워졌다. 서유럽식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라틴 제국의 영토와는 달리, 자신의 세력의 확실한 근거지에 자리잡은 각 망명국가들은 역설적이게도 각 지방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니케아 제국의 라스카리스 가문 또한 아나톨리아 서부의 군벌로, 니케아를 주변으로 한 영토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처음에는 라틴 제국의 군대 앞에 각 지방의 분열된 제국들은 멸망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라틴 제국이 패배한 틈을 타 재빨리 세력을 확장하였다. 라스카리스 황제들은 아나톨리아를 튼튼한 경제 기반으로 삼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없는 제국을 건실한 국가로 재건하였다. 소농민들을 보호하는 정책 덕분에 도시의 성장과 상업적 농업의 발달이 이어졌다. 거기에 아나톨리아에서는 [[몽골]]의 침략기에는 [[룸 술탄국]]이 [[몸빵]]을 해주면서 '''비참하게 와해'''된 덕분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룸 술탄국 이외의 경쟁국들인 [[라틴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테살로니키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세르비아 왕국]] 등도 모두 외우내환으로 휘청거렸기 때문에 어부지리도 챙길 수 있었다. 단, 거듭되는 성공과는 별개로 [[니케아 제국]]은 옛 동로마 제국과는 제도의 근본부터가 달랐다. 니케아 제국은 명망높은 가문들의 '''[[집단지도체제]]'''에 가까웠는데, 엄격한 중앙집권체제인 옛 제도와는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지방분권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니케아 제국의 군주들은 국방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유사한 [[프로니아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후에 동로마 제국의 행정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이전에 입력이 되어있었지만 잘못된 정보이다. 프로니아 제도는 이미 니케아 제국 이전인 콤니노스 왕조 시절부터 서서히 정착되어 가고 있었으며 니케아 제국으로 내려오면 이미 테마군은 박살날대로 박살난 상황이었기에 프로니아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리고 세습이 제도화 된 것은 미하일 8세 시절인지라[* 다만 이 조치도 최초에는 프로니아의 계승자들이 군역을 질 경우나 군인의 유복자에게만 해당되었으며, 이후에도 제국에 충성하며 공직을 수행하는 대상에게만 허용되었다. 즉, 완전 세습이 아니다.] 니케아 제국 시기에 프로니아와 봉건제도와의 유사성은 생각보다 없었다. 결정적으로 테오도로스 1세가 8천의 정예병을 키워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것이 프로니아 제도임을 감안하면 프로니아 제도가 멸망할 뻔한 제국을 지켰으면 지켰지 제국을 약화시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c586&logNo=220546662953&referrerCode=0&searchKeyword=%ED%94%84%EB%A1%9C%EB%85%B8%EC%9D%B4%EC%95%84|자세한건 여길 참조하자]]] || [[파일:empire-of-nicaea-4287909a-c7d3-444b-8c4f-78810745075-resize-750.webp]] || || 명군 [[요안니스 3세]]가 죽은 직후의 니케아 제국, 사실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로마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 1254년에 즉위한 테오도로스 2세는 선임 황제들과는 다르게 이전까지 국가의 중역을 맡고 있었던 명망높은 대귀족들을 대놓고 적시하였다. 5년이라는 짧은 통치 동안 그는 과민하고 병적인 수준으로 명사들을 탄압했으며, 특히 장군들을 불신했다. 이에 니케아 제국의 결속은 단기간에 와해될 위기에 처하였다. 결국 1258년 황제가 급사한 이후 그 아들인 요안니스 4세가 제위에 오르나 곧 명망높은 장군이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창시자 [[미하일 8세]]가 소산드라 쿠데타로 섭정단을 제거하고 마치 350년 전쯤의 [[로마노스 1세]]처럼[* 단 로마노스는 당대에 출세한 소위 [[개천에서 용 난다|개룡남]]이었지만, 미하일은 이미 요안니스 4세와는 알렉시오스 3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7촌 아저씨뻘의 친척으로 이미 귀족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공동황제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명목상으로는 테오도로스 2세의 일곱 살짜리 아들 요안니스 4세의 공동 황제였으나, 3년 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복되고 요안니스 4세는 실명된 후 유폐되었다. 한편 테오도로스 2세 사후 니케아 제국의 혼란을 틈타 세르비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양 시칠리아 왕국이 삼자동맹을 맺어 전면전에 들어갔으나, 미하일 8세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뒤이어 [[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했다]]. 이에는 운이 따라주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해 있던 [[라틴 제국]] 군대가 베네치아의 원정에 차출되어 잠시 떠나있던 참에 이를 포착한 '''정찰대'''가 수도를 점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